미국 영주권 인터뷰 승인 후기: I-245(i)와 보스턴에서 걸어온 3년의 기록

카드 한 장을 받으려고, 나는 여고생 때부터의 인생을 걸었다

Letters to My Girls · 이민 에세이 · 245(i)

내가 선택한 나의 홈?

서류를 넣고 3년 가까이 기다렸다. 겨울, 흐리고 바람 부는 보스턴의 어느 11월 날, 남편과 나, 그리고 세 살 된 큰애를 안고 시내로 향했다.

대기실에서 우리와 같은 영주권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을 봤다. 변호사와 침울하게 이야기하는 모습. 두 팀을 연달아 봤는데, 같은 심사관이었다. 우리는 속으로 빌었다. 저 사람만 아니길. 그런데 우리 이름을 부른 건 바로 그 이민관이었다.

각오했다. 까다로운 심사가 될 거라고.

방에 들어가니 세 살 된 딸은 옆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마치 어른처럼. 심사관과 남편과 나, 세 사람을 딸이 조용히 바라봤다.

심사관이 물었다. 변호사나 통역 없이 왔냐고. 원하면 다른 날로 바꿔줄 수 있다고. 우리는 오늘 하고 싶다고, 영어는 된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영어는 어디서 배웠나요?"

너무 황당한 질문이었다. 우리는 영어로 생활하는 사람들인데, 왜 이런 질문을. 남편이 당황해서 대답을 못 하자, 나는 습관처럼 심사관과 똑같은 영어 발음으로 남편에게 그 질문을 그대로 되물었다. 한국말로 통역해줬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영어가 먼저 나온 거였다. 그러자 심사관이 말했다. 지금은 남편에게 묻는 거니 가만히 있으라고.

그 방 안에서 나는 잠깐, 열여섯 살의 나를 생각했다. 사전 하나 들고 혼자 한국을 떠나던 그 아이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이야기였다.

열여섯, 사전 하나 들고

열여섯 살에 나는 혼자 한국을 떠났다. 그때는 호주가 유학 비자를 받기 가장 쉬운 나라였다. 유럽 여러 나라의 학교를 둘러보고 왔지만, 나는 그냥 빨리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간 곳이 호주였다.

호주에서 1년, 대학 진학을 위한 파운데이션 코스를 밟으며 영어를 배웠다. 원래 하고 싶었던 건 연기였는데, 영어가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학교는 호텔경영학을 권했다. 그러다 스위스의 한 호텔학교 광고를 보고, 나는 다시 짐을 쌌다.

스위스에서 호텔경영을 공부했다. 그런데 연기의 꿈을 끝내 놓을 수가 없었다. 1년 만에 그곳을 떠나 영국으로 날아갔다.

런던에서 나는 드라마스쿨 입학 오디션을 3년 연속 봤다.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3년째 되던 해에 마침내 합격했다. 그 학교가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있는 연기 훈련의 뿌리, School of the Science of Acting이다.

윔블던에서 만난 아르바이트생

떨어지던 3년 동안 비자를 연장하려고 메서드 연기학원이며 영화학교며 여기저기 다녔다. 그 시절, 윔블던에서 내가 살 수 있는 집을 구하러 나왔다가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복덕방에 갔다. 그런데 그날 나온 아르바이트생이 지금의 남편이다. 그 무렵 나는 한국 사람들이 하는 하숙집을 전전하다 자기 집을 구하러 온 참이었다.

나보다 일곱 살 많은 그에게 나는 장난처럼 말했다. 나를 누나라고 불러야 한다고, 내가 더 나이를 먹었다고. 그런데 계약하러 가는 날, 나는 갑자기 아파서 응급실로 실려갔다.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고 집을 잠깐만 잡아달라고 부탁한 뒤, 응급실에서 나오자마자 아픈 몸으로 복덕방에 가서 계약을 했다. 남편 말로는, 그날 내 얼굴이 약 때문에 온통 퍼렇고 빨개서 사람 얼굴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아픈 채로 약속을 지키러 온 게 예뻐 보였다고 한다.

영국 런던의 집값은 하늘 값이었다. 그나마 존 4인 윔블던이 가격이 나아서, 나는 그곳에 2베드룸을 구했다. 생활비를 아끼려고 룸메이트를 구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도 같이 살던 룸메이트와 헤어지고 집을 찾던 중이었다. 그렇게 그가 내 아파트로 들어왔다. 어느 날 내 생일에 그는 미역국을 끓여줬다. 그 한 그릇에,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남편은 런던의 한 대학에서 경영학과 컴퓨터를 전공했다. 그는 나보다 먼저 졸업했다. 외동아들이었던 그는 졸업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아직 2년을 더 공부해야 했다.

스물일곱, 나는 학업을 마치고 결혼을 하러 한국으로 갔다. 양가 부모님 모두 한국에 계셨으니 그곳에서 식을 올리는 게 자연스러웠다. 결혼 후 그해 여름, 우리는 신혼여행으로 미국에 갔다.

그리고 11월, 우리는 미국을 다시 찾았다. 이번엔 여행이 아니라 비교해보려고 — 영국과 미국, 어디에서 살아야 할지. 잠깐 방문할 생각이었다. 그때 나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다. 여름 신혼여행에서 생긴, 허니문 베이비였다.

체류가 길어지고, 아이를 낳고 보니 나는 이미 오버스테이가 되어 있었다. 한국으로 갈지, 영국으로 갈지, 미국에 눌러앉을지. 답이 안 보이는 채로 몇 달을 흘려보냈다.

뉴스에서 I-245i라는 법이 나왔다는 소식을 봤다. 처음엔 흘려들었다. 그런데 조건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 손이 멈췄다. 1999년 12월 30일까지 미국에 들어온 사람. 우리는 1999년 11월 14일에 들어왔다. 날짜를 짚어보고 또 짚어봤다. 틀림없었다.

여기가 내 홈이 되겠구나. 운명이네.

서른넷, 남성복 매장 매니저가 된 남편

접수 마감은 2000년 2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달 남짓이었다. 그 안에 스폰서를 구해야 했다.

남편의 전공은 컴퓨터와 경영, 그리고 일본에서 공부한 인테리어 디자인이었다. 그런데 그 분야로는 미국 회사에서 스폰서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한국 커뮤니티 신문을 뒤지다가 발견한 건 전혀 상관없는 남성 의류 매장의 매니저 자리였다.

남편은 하기 싫다고 했다. "이렇게 부당하게 일하는 게 어디 있냐"고. 전공과 무관한 것도 그렇고, 그 돈으로 생활이 되냐고도 했다. 그래도 나는 계속 밀어붙였다. 영주권 받을 때까지만 해보자고.

우리에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오랜 외국 생활 끝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나에게 얼마나 힘들지, 그리고 큰애를 한국의 입시 경쟁 속에서, "최고여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키우고 싶지 않다는 것.

나의 엄마는 스스로를 희생해서 나에게 날개를 달아주셨다. 어린 나이에 내 뜻대로, 나를 부수고 다시 채우는 배움을 할 수 있게. 참다운 자유를 누리게. 그렇게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난 나에게, 엄마는 단 한 번도 돌아오라 하신 적이 없다. 본인이 외로우실 때도, 치매로 아프실 때도.

그 자유를 나는 부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결국 피츠버그를 떠나 보스턴 근처, 해버힐이라는 동네로 옮겨 일을 시작했다. 보스턴 근처는 엄두도 못 냈다. 해버힐이 그나마 가장 쌌으니까. 아침 10시부터 밤 9시까지, 그 사이 편도 한 시간 넘는 길을 매일 오갔다. 일주일에 겨우 반나절 쉬면서.

사장은 부당한 대우와 욕설을 서슴지 않았다. 한번은 남편이 화가 나서 그만두겠다고 나온 적이 있다. 그런데 남편이 없으니 매장이 마비가 됐다. 사장은 다시 남편을 불렀고, 남편은 다시 돌아갔다.

전공도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그 자리를 지켰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에서 태어난 큰애와 함께 이 땅에서 합법적인 신분으로 정정당당하게 살기 위해서였다. 주급 345불로 생활이 가능했겠는가.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몸과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그 자리에 바위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어느 날 치과 가는 길에, 남편이 불쑥 말했다. 힘들고 화가 나도 어금니를 꽉 물고 일했다고. 그래서 이가 이렇게 다 망가진 거라고. 그 말을 무덤덤하게 하는 남편 옆에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한번은 크게 말다툼을 한 적이 있다. 시작은 별일도 아니었다. 일도, 육아도, 버티는 것도, 한국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부모님 소식도, 둘 다 감당하기엔 너무 많았던 날이었다.

평소엔 말이 없던 남편이 그날은 입을 열었다. 여태 내가 말을 안 하니까 아무 생각 없는 줄 알았냐고. 자기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내가 힘들까 봐 참았던 거라고.

여행 가방만 한 서류뭉치, 나 혼자 다 체크했다

그 무렵 우리 살림은 빠듯했다. 부모님들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다. 시아버님도, 친정엄마도. 필요할 때만 쓰자고 다짐하면서도 매달 손을 벌려야 했다.

남편은 남편대로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 아이를 지키고 우리 보금자리를 지키는 건 내 책임이었다.

무서운 게 세 가지 있었다. 첫째는 무지함이었다. 애를 어떻게 키우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둘째는, 나도 아직 어린데 나보고 어른이 되라는 것. 엄마가 되라는 중압감이었다. 셋째는,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놀고 싶다는 것. 밤새 무대 세트를 만들고 그 자리에서 자다가 다시 일어나 리허설하고, 공연을 마치면 다 같이 펍에 가서 한잔하며 끝을 자축하던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현실은 새벽마다 한 시간 간격으로 깨는 아기였다. 지쳐서 내 배 위에 눕혀 재우고, 먹이고, 기저귀 갈고, 다시 재우고, 또 먹이고. 반복되는 생활이었다.

아이가 한 살을 넘기면서, 나한테 친구가 없으니 아이한테도 친구가 없는 것 같아 고민했다. 그래서 연극 학교에서 배운 대로,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더 깊이 느낄 수 있도록 뮤지엄이란 뮤지엄은 다 뒤져서 데리고 다녔다. 칠드런스 뮤지엄, 사이언스 뮤지엄, 수족관, 아트 뮤지엄, 동물원, 공공기관에서 하는 어린이 프로그램. 스토리텔링 시간엔 초코칩 쿠키와 우유를 얻어먹으며 동화책 이야기를 같이 들었고, 인디언 문화 행사에서는 음악에 맞춰 간단한 춤을 배우고 드림캐처를 같이 만들었다. 보스턴 커먼 파크로 가는 길엔 교회에서 하는 행사에 잠깐 들러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놀게 했다.

동네 놀이터에서, 동양인 아이라는 이유로 다른 아이들이 선뜻 다가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먼저 딸 옆에서 신나게 놀았다. 우리 둘이 깔깔거리는 게 궁금했는지 하나둘 다가와 같이 놀아도 되냐고 물었고, 아이들이 모이면 나는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나는 죽어라 다녔다. 내 안의 나쁜 생각들이 나를 잡아먹을까 봐. 그러면 그게 내 아이까지 잡아먹을까 봐. 그래서 늘 나 자신과 싸웠다. 그 생각들을 흘려보내고, 밀어내고, 또 흘려보내면서.

그 시간은 아이만 자란 게 아니었다. 나도 어른으로, 엄마로 자라나는 시간이었다. 서류만 붙들고 있던 건 아니었다.

차는 한 대뿐이라 유모차를 끌고 다녔다. 길을 건널 때마다 나는 노래를 불렀다. "It is red~ Joan, what we have to do? Stop and wait~ It is blue~ oh yeah~ let's move~ but we have to check car is stopped~" 뮤지엄으로 가는 길, 퀸시마켓에서 광대가 풍선을 만들어주면 줄 서서 기다리는 법을 가르치며 함께 섰다. 머리엔 풍선 왕관, 손엔 꽃 모양 풍선 방망이를 들고 좋아하던 딸의 얼굴이, 아직도 내 가슴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동네 한국 할머님이 삼계탕을 끓여 오신 날이 있었다. 냄비를 문 앞에 놓고 가시며, 남편 먹이라고 했다. 뜨거운 냄비를 들고 들어오면서 나는 웃었다. 그런데 뒤돌아서는 순간 눈물이 났다. 우리가 그렇게 힘들어 보였구나, 하는 생각에. 형편이 좀 나은 한국 분은 언제든 와서 밥 먹으라며 부엌을 열어주셨고, 그 집 수영장에서 아이를 놀게 해주셨다. 받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그 밥 한 끼에도 계속 미안했다.

변호사를 통해서만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다고 해서, 우리는 변호사가 요구하는 모든 서류를 한국에서 공증받아 보냈다. 회사의 구인광고 자료가 필요하다 해서 보스턴 신문에 우리 돈으로 광고까지 냈다.

여행 가방만 한 서류 뭉치가 왔다. 아이를 재우고 나면 그걸 펼쳤다. 영어 단어 하나를 한국말로 찾으면, 그 한국말이 또 무슨 뜻인지 몰라서 사전을 다시 뒤졌다. 우리 가족의 앞날이 이 종이 뭉치 안에 다 들어있는데, 나는 그 안에 쓰인 말을 반도 못 읽는 사람이었다. 그게 무서웠다. 서류가 아니라, 그 무지가. 변호사에게 묻고 또 물었다. 눈치를 보며.

나중에 지인 중 변호사가 있어 우리 서류를 검토해준 적이 있다. 보스턴 이민국 출신이었던 그는 서류를 보더니 말했다. 스폰서가 애초에 스폰서 자격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는데, 그런 채로 스폰서를 한 거라고. 자기가 심사관이었으면 이런 서류는 패스시키지 않았을 거라고.

큰돈을 낸 변호사였다. 그런데 그 정도였다.

미국 이민사회 한인들 사이에 오래된 농담이 있다. "삼대사(三大士)" — 사기꾼이 가장 많은 세 직업. 변호사, 회계사, 정비사. 이 세 분야에서 정직하고 실력 있는 사람 만나면 그건 순전히 운이라고. 우리 케이스가 딱 그 농담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걸려온 전화들

그 3년 동안, 한국에서 계속 전화가 왔다.

아빠는 엄마가 치매에 걸렸다고 했다. 엄마 명의로 되어 있던 것들을 아빠 이름으로 옮기고, 엄마가 나 주려고 만들어놓았던 내 이름의 통장들도 다 정리하셨다고 했다. 네가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엄마가 너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어느 날은, 오늘 엄마가 영희 어디 있느냐고, 영희 불러오라고 하셨다고 했다.

시어머님은 목욕탕에서 넘어져 쓰러지셨다. 집안일하시던 분이 침대로 옮겼는데, 곧장 병원에 가지 않았다. 다음 날 일어나지 못하셔서 응급실로 갔고, 검사 결과는 뇌출혈이었다. 그 후로 의식을 찾지 못하셨다.

우리는 그 모든 걸 미국에서 전화로 들었다. 가지도 못했다. 짐을 쌌다가, 풀었다가. 수만 번을 그랬다. 나가려다 포기하고, 또 나가려다 또 포기했다.

영주권 인터뷰실, 보스턴

지금은 남편에게 묻는 거니 가만히 있으라고, 심사관이 다시 말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됐다. 한번은 남편이 못 알아들어서 내가 통역을 해주려 하자, 심사관은 다시 나를 제지했다. 니 남편한테 물어보는 거라고.

그러고 나서 그는 페이체크를 모아온 게 있냐고 물었다. 나는 3년 치 뱅크 스테이트먼트를 모아둔 커다란 파일을 내밀었다. 매주 345불씩 입금된 기록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날부터는 주급이 455불로 올랐다고 설명했다. 세금 낸 증명도 보여달라고 했다. 회사가 남편을 W-2가 아니라 독립계약자로 신고해놓은 바람에, 우리는 두 번이나 목돈으로 세금을 물어야 했다. 주급 받으며 빠듯하게 사느라 모아둔 돈이 없어서, 두 번 다 엄마한테 울면서 전화해 도움을 받았다. 그 세금 보고 서류도 꺼내 보여줬다.

변호사가 준 서류만이 아니었다. 내가 이민관이라면 뭘 물어볼까, 밤마다 생각하고 예측하면서 그보다 훨씬 많은 서류를 따로 준비해뒀었다.

그러다 그가 우리가 영국에서 공부했다는 걸 알았다. 자기도 런던에서 왔다고 했다. 그 순간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너희들 패스야." 그런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서류가 있어서 오늘 당장 카드는 못 주지만, 몇 주 안에 편지가 갈 거라고. 그때 다시 와서 위층에서 마저 수속하라고.

우리 세 살배기 딸을 보며 그는 농담을 했다. 이 아이가 시민권자로서 너희 보증인 역할을 한 거라고.

앓던 이가 빠졌는데, 기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 나는 불안했다. 패스라고는 했지만, 서류가 마저 확인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잘못되면 어떡하지, 짜증이 밀려왔다.

2주 후 편지가 왔다. 이 날짜에 이민국으로 오라는, 영주권을 만들어주겠다는 편지.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냥 기쁘지가 않았다. 아무 느낌이 없다고 해야 하나. 너무 오래 긴장해 있어서, 그게 풀리는 순간 오히려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카드를 받은 날, 든 생각은 하나였다. 아, 이 작은 카드 한 장에, 나는 열여섯부터 지금까지의 전부를 걸었구나.

그리고 곧바로, 부모님을 뵈러 나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큰애를 데리고 양쪽 부모님께 인사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이미 늦어 있었다. 그 무렵 친정엄마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이 지워지고 있었고, 시어머님은 머리를 다쳐 위급한 상태였다.

이 카드 한 장을 받으려고, 나는 양쪽 부모님을 뒤로했던 거였다. 마냥 기쁠 수가 없었다.

태어나는 것도 내 선택이 아니었다. 부모를 고르는 것도, 태어난 나라를 고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순간, 나는 온전히 나의 결정으로 미국을 나의 나라로 선택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 거였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완전히 내 것인 선택.

지금의 나에게

나의 선택에는 많은 희생이 있었다. 부모님을 등져야 했다. 옆에서 병간호하고, 보살피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고 — 내가 받았던 만큼 돌려드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의 나에게 말한다. 최선을 다해서, 즐겁게 살라고. 부모님의 희생도 함께 갈아 넣었으니, 그들의 몫까지 함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라, 영희야.

지금 영주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겪던 시절엔 못된 스폰서들이 정말 많았다. 그때도 힘들었지만, 요즘은 강화된 법이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게 보인다. 그 강경함은 처음부터 사람들이 포기하게 만들려고, 더 강하게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차근차근 풀어나가시길. 최선을 다해서.

거짓말이나 위법이 아니라면, 서류는 더 철저하게 준비하시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이 아무리 강경해져도, 완벽한 서류와 진실한 삶의 궤적 앞에서는 결국 무력해진다. 영주권을 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변호사는, 정말 잘 골라야 한다. 삼대사라는 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 카드 한 장에, 나는 열여섯부터의 인생을 걸었다. 그리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런던에서는 돈을 안 받고도 무대에 섰다. 엄마가 학비도 생활비도 넉넉히 대주셨으니, 나는 예술을 한다며 그럴 수 있었다. 양가가 반대하는 결혼을 하고, 한국에서 살라는 말을 다 엎고 영국으로, 미국으로 왔다.

그런데 미국은 달랐다. 돈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신분도 없었고, 뱃속엔 아이가 있었고, 낳고 나서는 봐줄 사람이 없어 내가 다 키워야 했다. 말도 못 하는 아이를 가슴에 안고 목에 이고 살았다. 부모님들은 죽지 않을 만큼만 도와주시면서 한국으로 돌아오라 하셨다. 우리는 버텼다.

3년을 오디션 보고 들어간 학교였다. 그 큰 무대는 다시 서지 못했지만, 꿈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지금도 나는 동네 아이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고, YMCA 연극 프로그램에서 아이들 연극을 연출하거나 그 옆에서 돕는다. 요즘은 백그라운드 배우로 카메라 앞에도 선다. 이민 1세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없다는 걸, 그렇게 배웠다. 대신 그 꿈을 더 작게, 더 오래 데리고 사는 법을 배웠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다시 그 시간을 걷고 있다. 웃다가, 울다가. 그리고 무섭다. 언젠가 이 감정들마저 잊어버릴까 봐.


245(i) 법안으로 어렵게 미국에 정착했던 저의 개인적인 기록입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낯선 땅에서 서류 한 장에 인생을 걸고 계신 분들의 막막한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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